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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의 시 속 좋은 떡갈나무 해석 해설

by bloggerkim2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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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문학정보입니다.

오늘은 현대시 중  정끝별의 시 속 좋은 떡갈나무 작품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시의 작품의 주제 내용은 생명의 근원 입니다. 그럼 상세한 내용은 밑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정끝별의 시 속 좋은 떡갈나무

정끝별의 시 속 좋은 떡갈나무

 

 

 

정끝별의 시, 속 좋은 떡갈나무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제재 : 떡갈나무
▶주제 : 생명의 근원적 터전으로서의 속 빈 떡갈나무
▶특징
유사한 통사구조 반복을 통해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1연의 속 빈 떡갈나무에는 ∼이(가) 산다 / 그 속에 ∼다와 2연의 속 빈 ∼을 ∼고) 이를 통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속 빈 떡갈나무의 풍성한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수혜의 대상인 생명체들을 나열하고 있다.
빈 것이 좋다는 역설적 발상이 보인다
상징적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음성상징어를 사용하고 있다(떡, 썩, 싹)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 버섯과 이끼, 딱따구리, 오소리와 여우 등의 다양한 생명체가 깃들여 살고 있다. 이들은 속 빈 떡갈나무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살아간다. 그리고 속 빈 떡갈나무는 이 모든 생명체를 큰 바람, 큰 가뭄, 큰 눈 들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므로 속 빈 떡갈나무는 생명체를 먹이고 품어 기르는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떡갈나무가 썩어 그 속을 비움으로써 생명체들이 그곳에 깃들여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속 빈 떡갈나무는 온갖 생명이 이루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생명 순환의 원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추가>
속이 빈 떡갈나무가 있다. 속이 비었으니 죽은 나무인가? 살아있는 나무가 제 속을 튼튼히 채우는 걸 보면 속이 빈 떡갈나무는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한다. 그런데, 속이 빈 떡갈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깃들어 있다. 속이 비어 제 한 몸 세우기도 힘들 텐데, 떡갈나무는 어떻게 이리 많은 생명들을 자기 품에 담을 생각을 했을까? 시인은 떡갈나무 속을 채운 다양한 생명들을 하나하나 시 세계로 불러낸다. 우선 벌레들이 있다. 벌레들은 나무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이 빈 나무는 벌레들이 살 집을 제공한다. 속이 빈 나무이기에 벌레들은 기꺼이 나무 품에 안긴다. 깃들이다라는 시어에서 나무 품에 편안히 안긴 벌레들이 느껴진다. 속이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도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딱따구리들은 부리로 나무를 갈아 곤충을 쪼아 먹는다. 속 빈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자는 박쥐들에 이르면 속이 빈 나무가 다른 생명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장소인지 새삼 알게 된다. 

올빼미들이 속 빈 나무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자리로도 속 빈 나무는 인기가 있다. 어디에나 속이 빈 나무들이 있고, 어디에나 그 속에 깃든 생명들이 있다. 생명은 이렇게 다른 생명과 만난다. 속이 빈 나무는 다른 생명들로 빈 곳을 채움으로써 항상 그득한 마음 상태로 세상과 대면한다. 속을 비우니 다른 생명들이 살 자리가 생긴다. 속을 채우려고만 하는 인간과는 얼마나 다른 나무인가? 오소리와 여우가 속 빈 나무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오소리는 오소리대로, 여우는 여우대로 속 빈 나무와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이렇게 무언가를 비운 존재로 하여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채우려고만 하는 존재끼리 만나면 싸운다. 채울 수 있는 대상은 항상 한정되어 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는 욕망은 그래서 진정한 관계를 멀리 한다. 제대로 비우지 않으면 속 빈 나무와 같은 상황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겠다.

속 빈 나무에 깃든 생명들은 속 빈 떡갈나무가 주는 밥을 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편안한 삶을 산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속이 빈 나무는 어떻게 제 몸을 온갖 생명들로 채운 채 견딜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은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라고 말한다. 속 빈 나무에 들어 사는 모든 생명은 속 빈 나무와 이미 하나가 되었다. 큰 바람이 불면 속 빈 나무는 품속에 기어든 생명들과 함께 버티고, 큰 가뭄이 들면 속 빈 나무는 품속에 있는 생명들과 더불어 견딘다. 제 속을 비운 나무는 하나면서 여럿인 생명으로 거듭난다. 한 생명이 자기 몸을 희생함으로써 모든 생명으로 거듭나는 이 과정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하나면서 여럿인 생명으로 구성된다. 저마다의 생명들은 자연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지만, 자연이라는 한 살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자연을 벗어나 홀로 사는 생명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여럿이면서 하나인 자연은 하나이면서 여럿인 생명을 함축하는 셈이다. 

시인은 “한세월 잘 썩어 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이라는 진술로 시를 맺는다. “어미들”이라는 시어가 또렷하게 보인다. 속이 빈 떡갈나무는 세상을 사는 모든 어미들 속과 닮았다. 어미들은 떡갈나무처럼 속을 비움으로써 모든 생명을 제 품으로 받아들인다. 속이 비지 않으면 생명을 받아들일 자리도 없다. 속이 비어야 생명이 잉태되고, 속이 비어야 다른 생명들이 들어설 수 있다. 어미들이 비운 속=자리는 그러므로 다른 생명들에게는 삶터와 다르지 않다. 제 몸을 비워 다른 생명의 삶터를 제공하는 이 상황을 희생이라는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표현할까? 희생이란 말을 가부장제 논리에 가둘 필요는 없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모성이라는 틀에 가둬 여성이 사는 삶을 억압한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미를 칭송함으로써 가부장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한다. 

시인이 가부장제에 내포된 이러한 희생 논리를 모를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시인은 왜 속 빈 떡갈나무의 삶을 세상 모든 어미들과 연결시키는 것일까? 바로 그 희생으로 세상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떡갈나무는 제 속을 비워 수많은 생명들을 키워낸다. 자연은 그 생명들이 모여 새로운 자연으로 거듭난다. 인간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어미들이 키워낸 자식들이 가부장제를 넘어 다시 어미 몸으로 돌아오는 그 과정을 시인은 속을 비운 떡갈나무의 너른 품에서 본 것은 아닐까? 물론 가부장제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시 제목을 보면, 시인은 떡갈나무에 속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속이 좋은 나무는 속을 비운 나무다. 사람으로 따지면 속이 좋은 어미는 속을 비운 어미다. 속이 좋아야 속을 비울 수 있다는 것일까? 속이 좋은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를 누구나 소망한다. 우리 시대를 사는 속이 좋은 어미들은 과연 어떨까? 속을 비운 어미들 품에 깃들어 사는 우리네 삶을 이제 한번쯤 돌아봐야 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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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목록
2018년 ebs수능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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